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그라쿠스 형제 (문단 편집) == 평가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와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금수저|로마에서 가장 유명하고 부유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을 수호하다 죽은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뛰어난 통찰력으로 로마가 가진 문제점을 파악하였고 높은 교양과 법률적인 지식을 무기로 이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중세에서든 근대에서든 현대에서든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평가는 학계에서도 대중에서도 매우 호의적이다. 물론 위에서도 지적하였듯이, 형제의 개혁에는 그들의 성품이 가진 고결함 뿐만 아니라, 정치적 야망도 함께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그러나 근래 연구가 밝혀낸 성과들은 형제들을 바라보는 조금 더 인간적인 관점을 제시하는 것일 뿐, 형제들이 받아야 할 찬사를 막진 않는다. 또한 이들의 법안은 원로원 귀족들의 이익에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형제를 둘러싼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혀 형제를 죽음으로 위협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는 이에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고 이들은 평민 집회가 가진 입법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원로원의 의사에 반하는 법안을 통과시킨다. 이는 당시 권력자들이었던 원로원의 심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었고 이러한 종류의 도전은 원로원은 공화정 설립 이후 처음 겪는 것이었다. 공화정이 생긴 이래 원로원은 실질적인 로마의 최고 권력 집단이었다. 집정관이 공식적으론 최고 권력자이나 이들은 집정관 경험이 없는 뜨내기들이 주로 맡았고 원로원은 전직 집정관이 우글거리는 집단이었다.[* 그 이유는 집정관은 해마다 두 명씩 나왔으며 이들은 연임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원로원은 대략 2~30여 명의 전직 집정관을 꾸준히 포함하고 있었다.] 또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는 인사들은 이미 원로원 의원이 된 상태였기 때문에 집정관들은 거의 모든 문제를 원로원과 상의하려고 하였으며 따라서 원로원의 의사는 곧 로마의 법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라쿠스 형제는 이러한 구조에 처음으로 도전한 것이다. 여지껏 호민관들 중 여지껏 그라쿠스 형제처럼 그들이 가진 권한을 쓴 적은 아무도 없었다. 사실 호민관의 권력은 막강하였다. 행정권과 군단 지휘권을 제외하고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한의 차이는 거의 없었으며, 아우구스투스가 '''집정관이 아니라 호민관 특권과 군단 지휘권 두개만으로 황제의 직위를 획득'''하였다는 사실에서 호민관의 막강함을 알 수 있다. 이 호민관 특권은 군사권만 빼면 황제의 권한과 전혀 다를바 없었으며 단지 아우구스투스는 일년 임기를 없애고 종신으로 호민관 권한을 가졌을 뿐이다. 그 이전에 강력한 군단 지휘권을 쥔 폼페이우스가 호민관 가비니우스의 배후에서 원로원에 불리하고 민중파에 유리한 법들을 잇따라 제정하게 했는데도 원로원이 아무 조치도 못 취했다는 점에서[* 호민관의 신성불가침도 무시할 수 있는 원로원 최종 권고가 있었지만, 강력한 군사력의 지원을 받는 호민관을 상대로 발동했다간 정치적 정당성은 물론 오히려 원로원이 박살날수도 있기 때문에 발동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 강력한 권한이 충분히 설명된다. 호민관에겐 독자적인 입법권, 사법권, 거부권이 있었기에 분명 법률적 권한은 막강했다. 이들은 원로원의 허락없이 자신의 재량만으로 재판을 열 수 있었고 법률을 민회에 회부할 수도 있었으며 원로원의 어떤 결정이나 입법도 거부권을 동원해 무력화할 수 있었다. 이들에게 이런 권력을 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원로원인데, 이는 원로원이 귀족과 평민의 차별을 없애라는 개혁을 요구하는 평민들의[* 이런 요구는 도시 국가에선 필연적으로 이루어 진다. 이 때문에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대부분 민주정으로 바뀌었고 귀족들은 몰락하게 되었다.] 요구를 수용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려는 편법 때문에 호민관이 이런 강력한 권력을 갖게 된 것이었다. 원로원은 평민들로 하여금 평민 집회를 따로 갖게 하였고 이들이 호민관을 선출하게 함으로써 기존의 정부 체제를 완전히 고수하는 한편 평민들의 정부를 따로 구성케 한다. 그리고 이 평민들의 정부를 자신들의 통제하에 둠으로써 "평민들의 요구 수용"과 "귀족들의 기득권 수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한다. 평민들의 정부가 완전히 원로원의 통제하에 두게 된 이유는 호민관에 출마할 자격을 가진 자들은 평민 귀족들 뿐이었기 때문에 이들은 원로원과 정치적 이익을 공유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이 자신들과 같은 계급이라고 생각한 그라쿠스 형제가 최초로 이 평민 정부를 움직여 로마의 개혁을 추진하고 원로원을 완전히 배제함으로써 최초로 평민 정부가 원로원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원로원은 위에 나오듯 이를 심각한 위협이라고 판단하였고 원로원을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법을 만들고 추진하는 것을 왕이 되려는 행보라고 판단하였다. 그럼으로써 원로원이 일찍이 없던 무력으로 호민관을 죽이는 초법적인 행동에 의지하게 만들었고 결국 그라쿠스 형제 이후 로마 정부는 피와 폭력으로 얼룩지게 된다.[* 키케로는 그의 저서에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왕위를 차지하려 시도했는데, 아니 오히려 그는 실제로 수개월간 통치했다고 말하는 편이 낫겠다.", "누만티아를 파괴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훌륭한 인물로 뛰어난 군인이지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를 죽인 평범한 개인 푸블리우스 나시카보다 공화국에 더 유익하지는 않았다."라고 말하며 티베리우스의 개혁이 공화국을 무너뜨릴 뻔 했다고 비판했다. 다만 키케로는 티베리우스에 대해 어느 정도 긍정적인 평을 많이 했기에, 그의 의도 자체는 선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즉,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정부의 모순점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이런 모순을 만든 건 다름아닌 원로원 계급이나 다름없었다. 군단 지휘권만 없었지 실제론 왕이나 다름없는 권한을 호민관들에게 줌으로써 사실상 로마내에 두개의 정부가 구성되게 만든 것은 바로 원로원들이었다. 이로써 이들은 사실상 다른 마음을 품은 정치세력이 마음만 먹으면 평민들로 이루어진 정부를 굴려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려 하는 길을 만들어 주었다. 훗날 민중파의 대두는 바로 이런 터전에서 생긴 것이며 이들은 사병화된 군단들과 영합하여 군사력까지 갖춤으로써 기어이 원로원 체제를 전복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훗날 제정이 되고 나서도 황제들이 다시[* 위에서도 강조했지만, 형제들의 농지법 자체는 당대에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 농지법이 '또' 시행되는 경우는 후대에 없었다는 의미.] 시도하지 않는데 이는 너무도 기득권과 반대되기 때문이었다.[* 급진적이었던 셈프로니우스 농지법과 달리, 폼페이우스 퇴역병들의 문제로 인해 보수파 군벌 폼페이우스의 힘을 얻은 카이사르는 집정관으로서 원로원 귀족들의 기득권을 어느정도 보장하는 형태의 율리우스 농지법을 통과시켜 왜곡을 어느정도 완화했다. [[시오노 나나미]]의 경우 카이사르가 통과시킨 농지법이 그라쿠스의 농지법이라고 서술함으로써 독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는데 실은 둘의 법안은 같지는 않았다. 로마인 이야기에도 서술되듯이 그라쿠스 형제가 국유지 임차에 있어 로마 귀족과 동맹시 기득권층의 이해를 크게 건드린 것과 달리, 대부분의 이탈리아 반도 도시민이 로마시민권을 얻은 상황에서 타협적인 내용의 율리우스 농지법이 통과되었다. 그 뒤에는 개선장군인 보수파 폼페이우스의 퇴역병들에 대한 보상이 있었고, 그 힘으로 평민회 통과가 가능했다.][* 당시 원로원 계급은 반드시 대농장을 경영하는 지주여야만 하였고, 원로원의 상업활동을 금지하는 법이 플라미니우스에 의해 규정되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그들의 사회적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는 유일한 수단은 대농장을 소유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므로 그라쿠스 형제의 농지법은 바로 이런 대농장의 소유를 금지케 하는 것이었며, 농지법의 시행은 사실상 원로원 계급의 씨를 말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의견이 있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들에게 있어선 절대적으로 농지법의 통과를 동의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설명되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그라쿠스 형제가 이것을 몰랐던 것인지 혹은 의도했던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원로원에게 있어 그들의 계급 자체를 파멸시키는 법안이나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도 지적했듯이, 농지 위원회가 해산되지 않고 셈프로니우스 농지법을 시행했다는 점은 이런 주장이 온당한 평가가 아니라는 반론을 가능하게 한다. 애시당초 그라쿠스의 형제의 법안에서 원로원의 사유농지 자체를 불법화 한적이 없다. 이전부터 농지의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은 정해져 있었지만 원로원이 일가족과 노예들 명의까지 동원해서 사실상 무제한으로 토지 점유가 이루어졌고, 그라쿠스는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임차와 소유의 상한선을 정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상한선을 넘긴 토지도 국가가 돈을 주고 사는 식이였다. 농지법에서 정해진 상한선은 1000유겔룸(250헥타르) 인데 이게 원로원을 파멸시킬 수준인지는 의문이다.][* 다만 그라쿠스 형제가 내세운 다른 개혁들은 대부분 이후에도 살아남거나 당대에는 시행되지 않았더라도 나중에 이뤄진다. 특히 곡물법의 경우, 가이우스 그라쿠스의 사후 어느 시점에 잠깐 폐지되었다가 사투르니누스가 부활시킨다. 이후 곡물법은 제정기에 무료 배급의 형식으로 바뀌면서, [[빵과 서커스]]에서 "빵"을 담당하게 된다.] 사실상 사유 재산에 한계를 긋는 것은 현대에 와서도 사회주의 외에 어디서도 시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고대~중세 국가의 귀족 집단의 기득권을 침해하는 행위는 성공 사례가 극히 드문데, 이런 귀족 집단의 영향력은 왕조차도 무시할 수 없으며, 이들이 왕보다 권력이 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대개 이들의 기득권이 전복된 것은 외부의 침략으로 아예 나라 전체가 쑥밭이 되거나 [[부르주아|또 다른 지배계급]]이 등장하여 [[귀족|기존 지배세력]][[프랑스 혁명|의 대체를 시도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한반도에서는 통일신라-후삼국시대-고려로의 이행 중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백제와 고구려의 경우 최상층 집단은 소수는 해외로 자의든 타의든 나가고 국내에 남은 다수는 성씨를 바꾸거나 하여 숨어 살았으나 통일신라의 견고한 골품제 아래에서 상층으로의 진입은 거의 봉쇄된 꼴이었고 극도로 운 좋은 몇몇 외엔 전원 중류 이하 계층으로 편입되었다. 최상층 바로 아래 이전의 삼한 거수국 지배층 혹은 고구려 5부의 일부였던 집단은 역시 상층으로의 진입은 완전 봉쇄되어 전원 중류 이하 계층으로만 살 수 있었을 뿐이었다. 물론 통일신라가 역사상 대항해시대 ~ 2차 대전 기간 중 꾸준히 등장하는 악질 침략국들-대표적인 예시로 일본 제국이 있다-마냥 백제와 고구려의 거의 모든 유민을 하류층으로 쑤셔박거나 노예화한 건 아니었으나 여하튼 정치적 권리가 있는 상층으로의 진입을 제도적으로 원천봉쇄한 건 사실이었다. 물론 통일신라라고 인물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무열왕계 왕실이 흡사 그라쿠스 형제처럼 선견지명을 갖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고 꾸준히 애썼으나 로마의 원로원 계급이 민중파의 모든 개혁 시도를 찍어눌렀듯 진골들 또한 가능한 수단을 다 써서 무열왕계 왕실의 모든 개혁 시도를 방해했으며, 끝내 무열왕계 왕실은 진골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물론 그 결과 등장한 원성왕계 왕실이라고 개혁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으나 무열왕계 왕실이 진골들 비위를 꾸준하게 거스르다 어떻게 되었는지 똑똑히 지켜본 이상 근본적인 개혁 시도는 무리였다. 끝내 고구려, 백제 유민들은 동맹시 전쟁 당시 궐기한 이탈리아인들이 그랬듯 한번 봇물이 터지자 서라벌 및 진골 집단에 대한 모든 공물 납부를 거부하며 집단으로 무력 행동에 나서게 되며 그 결과 벌어지는 혼란 상황은 마치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그랬듯 패서의 고구려 유민 왕건이 수습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견훤은 이런 구도에선 기존 체제 파괴자와 경쟁자 역할을 모두 수행했다. 술라와 안토니우스가 했던 역할을 한 셈이다.][* 이슬람 제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무아위야 왕조는 겉으로는 다 같이 평등한 이슬람 교도라고 하였으나 그건 말 뿐이었고 실제로는 비아랍계에 대한 꾸준한 차별이 있었다. 아바스 왕조의 등장은 같은 이슬람 교도고 납세는 더 많이 하는데 어째서 정치, 경제, 사회상 권리가 차별되어야 하는 가에 대한 비아랍계들의 강력한 반격 양상도 있었다.] 그라쿠스 형제는 농지 개혁을 원로원과 관료들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시도하려 하였고, 이에 맞서 원로원은 위법적인 무력 수단을 동원한다. 그 결과 그라쿠스 형제는 목숨을 잃고 로마는 엄청난 혼란에 빠진다. 이는 결국 원로원과, 부족한 힘으로 무모한 개혁을 시도한 그라쿠스 형제의 대결이 결국 원로원의 승리로 끝난 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를 비롯한 내부적인 모순이 쌓이고 쌓여 원로원은 점점 지지를 잃어갔으며 마침내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를 거쳐 원로원은 힘을 잃고 로마는 [[황제]]가 다스리는 제정으로 가게 된다. 따라서 그라쿠스 형제의 출현은 로마 공화정의 모순된 정치구조를 보여주는 최초의 조짐이라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기득권 출신이었음에도 기득권에 반하는 개혁을 추진하다가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했다는 점 때문에 후세의 많은 동정을 받았으며, 때문에 그라쿠스라는 이름은 ''''양심적인 로마인''''을 묘사할 때 애용되는 이름으로 남아 고대 로마를 다룬 작품에서 등장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스파르타쿠스와 노예들의 처지를 동정한 민중파 영수의 이름도, 영화 [[글래디에이터(영화)|글래디에이터]]에서 [[콤모두스]] 황제 이후의 로마를 맡아 공화정으로 회귀시킬 역할을 맡은 원로원 의원의 이름도 모두 그라쿠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